"누가 보면 김승민 집인 줄 알겠어."
"넌 형한테 말버릇이 뭐니."
등교를 준비하던 정인이 방에서 나오니 자기 집처럼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승민의 등을 보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었다. 승민은 먹던 수저를 가지런히 내려두고선 목소리를 따라 정인을 바라보았다. 방금 막 말리고 온 듯 부스스한 머리가 얼마나 기른건지 교복 깃까지 닿았다. 자신의 머리를 보는 승민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정인은 괜히 신경 안 쓰는 척 교복 깃에 닿은 뒷머리를 정리하며 툴툴거렸다.
"형은 왜 우리 집에서 밥 먹어."
"어머니 김치찌개가 맛있으니까."
정인을 힐끗 바라보며 대답한 승민은 제 옆으로 턱짓했다. 닥치고 앉아서 밥이나 먹으라는 뜻인걸 단번에 알았지만 정인은 모른 척 소파 위에 있던 가방을 들고선 한쪽 어깨에 들쳐멨다. 준 신호를 무시한 채 현관 앞까지 걸어가는 정인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본 승민은 한 마디 더 던졌다.
"밥 먹고 같이 가."
"안 먹어."
같이 가자는 승민의 말에 단호히 거절하더니 신발은 뒷창에 손가락을 넣어가며 깔끔히 잘 신고 어머니께 허리 굽혀 인사하고 나간다. 정인의 뒷모습이 사라지며 문이 닫히자 어머니는 걱정된다는 듯이 한탄을 했다.
"내년에 고삼인데 그때도 저러고 있을까 걱정이다. 걱정이야."
"저도 이만 가볼게요. 아침 맛있었어요."
"그래그래. 승민아 언제든 편하게 오렴."
승민은 더 말하지 않고 은은하게 웃으며 의자에 걸어두었던 가방을 매고 끝까지 예의 지키며 꾸벅 인사한 뒤 밖을 나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자동문 버튼을 꾹 눌러 나오면 8월의 중순이라 늦여름의 햇빛이 강했다. 인상을 쓰며 옆을 보니 먼저 나갔던 정인이 땡볕에 못 이겨 단추를 풀어헤치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게 밥 먹고 같이 나오자고 했잖아."
"됐어. 어차피 아침 잘 안 먹어."
정인은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익숙한 듯 승민이 옆에 나란히 걷는다. 부모님이 없는 승민이 초등학생 때 맡겨진 교회에서 정인의 가족을 처음 만나 안타깝게 여긴 정인의 어머니가 데리고 오면서 한집에서 잠깐 살았다 보니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함께 등교하는 것은 둘만의 암묵적인 룰 같은 거였다. 싸우더라도 떨어져 걸으며 등교했을 정도로 암묵적으로 지켜왔다. 8년 전만 해도 정말 아기였는데. 승민은 고개를 돌려 어느새 자라 눈높이가 비슷해진 정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느껴진 건지 같이 고개를 돌려 승민과 눈이 마주치자 정인은 먼저 시선을 돌리고 살짝 몸을 피하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형이 우리 집 오는 거 불편해."
"왜?"
"......알면서 물어보는 것 좀 그만해. 사람 쪽팔리게."
정인의 말에 승민은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먼저 앞서 나간 정인의 동그란 뒤통수가 보였다. 승민은 정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한 건 아니었다. 언뜻 정인의 모습에서 지나가는 장면이 발을 멈추고 입을 다물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해 한참 적응기가 끝나던 지금과 같은 여름날이었다.
나보다 한참 작고 말랐던 정인이 얼굴을 붉히며 쑥스럽게 고백을 했고,
나는 그 고백을 거절했다.
애지중지하는 동생
c.blue
9월 모의고사를 앞둔 평범한 남고, 고3의 반 치고 굉장히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특히 반 뽑기에 실패한 승민의 반은 노는 애들이 몰려 하루하루가 축제였다. 그 분위기 속에서도 승민은 어떻게든 공부해보겠다고 수학 문제집을 꺼내 문제를 읽는데도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에어팟을 두 귀에 꽂고 눈을 감은 채로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노이즈 캔슬링이 된 에어팟 속에서도 윙윙 거리는 소음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펜을 드니 핸드폰과 자동으로 연결된 에어팟에서 알림 소리가 들렸다. 승민은 살짝 방해받는 기분에 인상을 쓰며 핸드폰을 보니 정인의 메시지였다.
형.
나 오늘 공부 못해.
왜?
짧은 승민의 대답을 읽었는지 한참 쓰는 것 같은 표시가 이어졌다. 정인은 9월 모의고사까지 승민과 남아서 공부하기로 약속했었다. 물론 승민이 하기 싫다는 애 끌어다 앉히긴 했다. 분명 공부는 못하더라도 수업은 꼬박꼬박 듣고 학원도 매번 출석했었는데 고백사건 이후로 일부러 보란 듯이 노는 애들과 어울리면서 탈선을 밟기 시작했다. 원래 성적도 그렇게 높은 등수가 아니라 떨어질 곳이 있겠어 했는데 그 아래가 있긴 했다.
성적표를 보고 충격받은 승민은 보다못해 공부를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었고 정인에게 제안을 했었다. 목표는 9월 모의고사, 승민도 고3이라 공부를 해야 했기에 겸사겸사 같이 공부하면서 등급을 올린다면 소원을 들어주기로. 그래서 만약 공부를 못 하는 상황이라면 이유를 말해주면 웬만한 건 다 빼줬었다. 근데...
있어.
한참 시간이 지나고 온 짧은 답장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이제는 이유도 말 안 한다 이 거지. 승민은 한참을 메시지를 노려보다 결국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종례가 끝나면 늘 책상에 앉아 있던 승민이 오늘은 가방을 챙기며 일어나고 있자 현진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승민은 쳐다도 안 보고 책상 서랍에서 꺼낸 문제집을 가방에 넣으며 무심히 왜. 하고 물었다. 그러자 현진은 그제야 복도 쪽을 한 번, 승민을 한 번 바라보더니 질문했다.
"오늘 정인이 안 와?"
"약속 있대서."
"아 그러네, 오늘 김민철 생일이잖아."
김민철. 이름이 현진의 입에서 나오자 가방의 지퍼를 닫던 승민의 손이 멈추었다. 눈길 한번 안 주더니 그제야 시선을 돌려 현진을 바라보았다. 김민철은 든든한 빽이라도 있는지 출석을 자유자재로 하고 공부를 안 하는 거 같으면서도 성적은 그럭저럭, 누구를 괴롭히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최근 화장실에서 걔네 무리가 담배 피우다 연기 때문에 소화벨이 울린 덕에 선도위가 열려 한동안 이슈였다.
한 마디로 양아치, 승민은 그렇게 머릿속에 박혀있었다. 그러니 승민은 정인한테 다 좋으니 김민철 무리와는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말했었다. 제대로 들은 거 같지도 않았지만.
"정인이가 거기 갔다는 거야?"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 그냥 내 예상, 정인이가 요새 김민철이랑 놀잖아."
승민은 왠지 모를 짜증이 올라오면서 괜히 현진에게 투덜댔고 잔뜩 예민해진 말티즈 마냥 인상을 찌푸리길래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던 현진은 얼른 자리를 피했다.
어둠이 짙은 저녁시간, 정인은 집을 눈에 두고도 아파트 정문 앞에서 서성였다. 시간이 늦은 줄 알고 겨우 형들한테 인사하고 도망가듯 왔는데, 겨우 8시를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김승민이 늘 우리 집이 지네 집 마냥 들어가 있으니 들어가기 눈치가 보였다. 특히 오늘은... 정인은 핸드폰을 들어 답장 없이 읽은 표시만 뜬 승민의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왜?
있어.
괜히 말 안 했나. 맨날 이유를 같이 써서 보내야 하는 게 짜증 나서 반항해본 거였는데. 물론 보내자마자 후회하고 생일파티에 간다고 썼다가, 승민이 답장을 하지 않아 다시 지우고 보내지 않았다. 적어도 안 된다고 하거나 다시 한번 물어볼 줄 알았다. 근데 읽기만 하고 답장이 없으니. 처음엔 그래라. 하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왜 물어보지 않았는지. 그게 너무 신경 쓰여서 생일파티에 가서도 잘 놀지도 못 했다. 이젠 이유도 안 궁금하나 보지?. 정인은 화면을 바라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짜증 나"
김승민 꼭 지옥에 떨어져라.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안 하고 정인은 괜히 핸드폰에 저주를 퍼붓더니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발길을 돌렸다. 단지 내에 있는 놀이터 벤치에나 앉아서 시간 때우다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입구서부터 그네에 앉아있는 익숙한 인영이 보여 제 자리에 멈추었다. 오늘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건지, 하늘이 무심하게 느껴졌다. 정인이 조금 더 다가가자 고개를 돌린 승민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일찍 왔네."
"왜 여깄어."
"네가 나 버렸잖아."
"뭘 버려. 미리 얘기했는데."
정인은 살짝 승민의 눈치를 봤는데 평소처럼 툭툭 장난치는 거 보니 기분은 괜찮은 것 같아서 조금 안심했다. 조용히 옆 그네에 앉아서 바닥에 닿은 발에 힘을 주면서 살짝살짝 흔들거리며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나 가만히 하늘을 보던 승민이 시선을 돌려 정인을 바라보았다.
"김민철 생일파티 간 거야?"
"알고 있었네."
"뻔하지 뭐, 이 양아치야."
승민은 앉아있는 정인의 어깨를 장난스레 툭 쳤다. 사실 정인이는 김민철 무리에 녹아들 만큼의 성격이 되지 못 했다. 무리 지어서 다니는 것도 딱히 재미 없었고, 피방가서 롤이나 하고 있을 시간에 김승민이랑 오버워치가 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정인이 김민철 무리에 끼어 노는 이유는 김승민이 김민철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김민철을 언급할 때마다, 김민철 무리에서 놀 때마다 신경 쓰여 하는 게 좋아서 그랬다.
"다음엔 그냥 얘기해줘. 가지 말라고는 안 할게."
"...신경 쓰였어?"
"걱정되잖아. 나 혼자 오면 어머니도 걱정하실 거고."
정인은 승민을 보기가 어려워 신발만 바라보고 있다가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멈칫하곤 고개를 들어 승민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 형은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건가?. 피 하나도 안 섞인 가족도 있나?. 정인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형한테 나는 뭐야?"
하다못해 나온 정인의 말에 승민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이 정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진지한 질문이었다는 걸 표정으로부터 알아챈 승민은 한참을 입을 꾹 다문 채로 몸을 기울여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하나 안 보이는 까만 어둠 속에서 어렸을 적 정인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교회에서 만난 작고 하얗고 웃는 게 귀여운 아이. 보조개가 깊게 쏙 박히면 그 보조개가 귀여워서 손가락으로 여러 번 찔러보기도 했다. 말랑한 살이 느껴질 땐 마음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생긴 건 예민하고 똑부러지게 생겨놓고 어딘가 허술하고 순해서 장난을 쳐도 모르고 받아주는 정인이가 좋았다.
승민은 특히 가족이라곤 자신과 이름도 잘 모르는 사촌 뿐이었으니까. 교회에서 혼자 지내면서 자라오니 정인의 어머니는 그런 승민을 안타까워하며 가족처럼 챙겨주고, 정말 가족처럼 한 집에서 자랐다. 중학생이 되면서 작기만 했던 정인이 언뜻 저와 시선이 비슷해지면서는 승민은 낯선 기분에 어렸을 때보다 덜 붙어 다녔다.
그렇게 정인의 고백 사건이 일어나기 전, 승민은 다른 때와 다름없이 집에 들어왔고 먼저 하교한 정인이 가방만 내려두고 소파에서 잠들고 있었다. 승민은 자기도 모르게 소파로 다가가 그자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그대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고 자신도 모르게 푹 팬 보조개에 손가락을 대고 눌렀다. 말랑한 피부가 느껴지자 전기라도 닿은 듯 놀라며 황급히 손을 뺀 승민은 심장 가까이에 댔다.
그 낯선 기분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버렸을 때. 승민은 간질거리는 심장이 참아지지 않아서 한참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가족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승민은 정인이가 좋았다, 정인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기에 정인의 고백을 거절하고, 붙어 있으면 욕심이 생길 것 같아서 일부러 같은 아파트에 다른 동에 집을 구해 따로 살았다.
하지만 어린 승민은 그걸 몰랐다.
누군갈 좋아한다는 것은 참을수록 더 갈구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나는 뭐냐고 묻는 정인을 바라보면서 승민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생. 이라고 말하기엔 양정인은 나에게 그저 동생이 아니었으니까. 생각이 깊어짐과 동시에 한참을 답을 기다린 정인은 정적이 이어지자 괜히 그런 질문을 했나. 조금 부끄러워져 없던 일로 치기 위해 그네에서 일어나 승민을 향해 몸을 돌리는 데 동시에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
"..."
"애지중지하는 동생."
승민의 대답에 정인은 오히려 머릿속이 비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막상 그 말을 뱉었던 승민은 정인을 미처 바라보지 못 하고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았다. 그런 승민의 모습을 보니 정인은 왜인지 안쓰러워 보였다. 사실 제일 안쓰러운 건 자신인데도, 비참한 기분이 들었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덤덤했다. 그리고 정인은 끝까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승민에 말을 던지고 공원을 나왔다.
"난 형 동생 안 할 거야."
다음날부터 정인은 승민을 피했다. 싸우더라도 함께 등교했던 암묵적인 룰 또한 지키지 않았다. 정인의 말이 신경 쓰여 미처 집에 들어가진 못 하고 한참을 집 앞에서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는 정인에 승민은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막막해진 승민은 한숨을 푹 쉬고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올려 꾹 눌렀다.
덕분에 학교는 겨우 지각을 면할 시간에 도착했다. 승민이 반에 들어오자 동시에 종이 쳤다. 가쁜 숨을 내쉬며 자리를 찾아 앉은 승민을 시선으로 쫓던 짝꿍 현진이 제 옆에 앉자마자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어? 네가 이 시간에 온다고?"
"말 걸지 마."
"또 말 그렇게 한다. 아오, 이걸."
현진은 장난스레 손을 올렸다가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한 승민의 얼굴에 그대로 내려두었다. 그리고 곧 조례시간이 되어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자 시선을 옮겼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종일 머릿속에는 양정인 뿐이었다. 옆에서 현진이 떠들고 소문 듣고 쉬는 시간에 찾아온 지성이 말을 걸었던 것 같은데 모든 말들은 승민의 머릿속에 담기지 않고 흘러갔다.
어떡하지. 내가 어떻게 해야 돌려놓을 수 있을까.
"어, 정인이다."
승민은 현진의 말에 시선을 따라 복도를 바라보니 정인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 먼저 뒷문으로 걸어가는 김민철의 뒤통수가 보였다. 승민은 순간 표정을 숨기지 못 하고 인상을 구겼다.
"야야... 괜찮냐?"
괜히 눈치 보던 현진이 조심스럽게 상태를 살폈다. 승민은 창문으로 보이는 정인과 민철의 모습만 뚫릴 듯 바라보고선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내가 양정인한테.
"진정해 좀. 김민철이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더 예민한 거야."
"......"
유일했으니까. 승민의 말은 꼭 듣던 정인이 처음으로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고 먼저 무리에 들어간. 그 유일한 사람이 김민철이라는 게, 정인에게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서라도 가까워지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승민은 무척 신경이 쓰이고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
이젠 대놓고 정인이를 반으로 부르고 먼저 나가는 뒤통수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가 슬쩍 뒤를 바라보는 김민철과 눈이 마주쳤을 땐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졌다. 다시 자리에 앉은 승민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죽여버릴까."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살인은 안된다 친구야. 수능은 봐야지."
농담이지?. 웃다가도 서늘한 기운에 놀란 현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승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제야 제대로 알았다. 참고 참아온 마음이 미친 듯이 양정인을 갈구했다.
모든 애들이 하교하는 시간, 승민은 혼자서 남았다. 왜냐하면 하교 시간은 정인과의 공부 시간이었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승민은 우선 모의고사 문제집을 꺼내 들어오지도 않는 검은 글씨로 적힌 문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7시가 지나도록 정인이는 오지 않았다. 결국 혼자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문제를 풀다가 막혀버리곤 핸드폰을 들었다.
공부는 해야l
공부하러 왜 안오l
약속했잖l
몇 번을 쓰고 적고 하다 결국 승민은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공원에서 기다릴게.
"야 양정인, 읽지 말라니까 읽었어?"
"나도 모르게 눌러서..."
정인은 핸드폰 속 승민의 메시지를 바라보다 언뜻 시간을 바라보니 곧 9시가 다 되었다. 보낸 시간이 7시 30분쯤이니까 대충 학교에서 공원까지의 시간을 생각해보니 8시, 그럼 아직 기다리고 있으려나. 정인은 문자를 본 뒤로 부터는 초조하게 시간만 계산해보고 있었다. 그런 정인을 보던 민철은 웃어버린다.
"일단 지금은 너의 빈자리를 느껴야 한다니까?"
"아 안다고."
"어휴, 도와준다고 해도."
"몰라. 나갈래. 형 알아서 해."
"지금?"
정인은 결국 헤드셋을 벗어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후반을 지나 이기고 있던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정인은 급하게 컴퓨터 전원을 끄고 의자에 걸쳐둔 마이를 챙겨 입고선 먼저 피시방을 떠났다. 어이없다는 듯이 뒷모습을 바라보던 민철은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저쪽 반응이 너무 빠른데.
정인은 무턱대고 나와 공원까지 뛰었는데 막상 공원에 가까워지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혹시나 화가 나서, 진짜 손절하는 거면 어떡하지. 점점 걸음걸이의 속도가 줄어들더니 우뚝 서서 멍하니 빈 공원을 바라보았다.
진짜 그러면 어떡하지. 정인은 순간 공포감에 동공이 떨려왔다, 아무리 둘러봐도 승민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고 쌀쌀한 바람만 불어올 뿐이었다. 괜히 서운해져 울컥 눈물이 고이려고 할 때였다.
"양정인."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 정인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일부러 뒤돌아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치려는데, 승민은 그런 정인의 팔을 붙잡았다.
"와놓고 어디가."
"신경 꺼"
갑자기 승민의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한 자신에게 짜증이 확 나서 자기도 모르게 날카롭게 쏘아댔다. 정인은 마음과 달리 나온 소리가 뻘쭘했으나 뱉은 말을 담아낼 수 없어서 붙잡은 손을 쳐내고 다시 공원으로 걸어가는 데 그 뒤로 조용히 쫓아온다.
"아 왜! 왜 쫓아오는데!"
"내가 너 여기 부른 건데?"
"불러서 온 거 아니거든."
정인이 버럭 신경질 내며 흘긋 얼굴을 보니 승민은 이빨 훤히 보이면서 그저 웃는다. 뭐가 좋다고 실실거리는 지. 정인은 마음에 하나도 안 들었다.
"그래. 그러면 왜 왔어."
"...공원이 형 거야? 그네 타러 온 거거든."
정인은 자연스럽게 걸음 앞에 있던 그네에 털썩 앉았다. 앉으니 어제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아 부끄러워져 고개를 털어내 기억을 지워냈다. 그런 정인을 바라보던 승민도 조용히 옆에 앉으려 하니 정인은 두 줄을 한 손에 잡아 당기며 못 앉게 했다.
"앉지 마."
"옆에 앉지 마? 나 진짜 가?"
"......"
"양아치. 그네가 다 니꺼야?"
"...짜증 나. 어이없어."
승민이 제 말을 따라 하자 정인이 끝내 손에 쥔 줄을 놓았다. 그네가 흔들리면서 제 자리를 찾았다. 승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한참을 조용히 삐걱거리는 그네 소리만 들렸다. 할 말 있어서 부른 거 아니었냐고. 정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겠는 승민의 옆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느껴졌는지 승민은 정인을 바라봤다.
"사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꽤 진지한 승민의 말이 왜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 건지. 정인은 처음 고백했을 때의 그날보다 더 마주보기가 무서웠다. 눈을 맞춰오는 큰 눈을 피해 앞을 바라본 정인은 말했다.
"그냥 말하지 마. 어제 일은 서로 잊자."
"응?"
정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승민은 그런 정인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형 말대로 김민철 형이라도 이제 안 놀 거고, 9월 모의고사 공부도 할게."
"......"
"그러니까 형. 우리..."
정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려고 애썼다. 가만히 듣던 승민은 마지막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정인이 잡고 있던 그넷줄을 부여잡았다. 흔들리던 그네가 갑자기 제동이 멈추는 바람에 정인의 몸이 살짝 휘청거리다 무게중심을 잡았을 땐 승민과 눈이 마주쳤고 그와 동시에 입술이 닿았다. 정인은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 눈을 감았다 뜨면 두 눈을 감고 내리 깐 승민의 눈꺼풀이 보였다.
정말 맞아?. 정인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뒤엉킬 동안 에라 모르겠다. 싶은 고개는 비스듬히 틀어지고 입술은 서서히 벌리며 완전히 맞물렸다. 그런 정인에 씨익 웃던 승민이 윗입술 한 번, 아랫입술 한 번 빨아당기며 자연스럽게 벌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오갔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축축한 소리가 이어지다 겨우 승민이 먼저 입술을 떼고 눈을 뜨면 열기 때문에 얼굴에 홍조가 가득해진 정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귀여워서 순간 못 참고 또 한 번 입을 맞출 뻔했다. 하지만 곧 눈뜨고도 멍하니 바라보는 정인에 승민은 어깨를 잡고 물었다.
"괜찮아?"
"..."
"정인아?"
"아. 어 형. 이제 집 가야지."
"뭐?"
"...그, 엄마가 기다릴 거 같아서."
"......"
승민은 그런 정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얘 나랑 방금 키스하지 않았나?. 어이가 없어서 천하의 김승민도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정인은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 하는 듯 그네에서 먼저 일어났고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먼저 가버린다. 미련 없이 떠나버린 뒷모습이 사라지기 전까지 승민은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나 지금... 차인 거?
-
이틀이었다, 양정인 얼굴 못 본 지. 교실을 찾아가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어떻게 잘 숨었는지 좁은 학교 안에서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로는 요즘은 저녁 일찍 돌아오고 아침 일찍 나간다는데 말만 들어서는 거의 모범생이었다. 혹시나 싶어 2교시 종치고 등교한 김민철한테 물어봤는데 자기도 모른단다.
"너희는 정인이랑 연락 안 해?"
"당연히 안 하지."
"너 때문에 번호도 못 물어봤잖아."
"...말을 말자."
자신의 마음과 달리 태평한 현진과 지성의 대답에 승민은 급해져 손톱을 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나 양정인 많이 좋아하는구나. 늘 눈에 보이던 정인이 눈에도 보이지 않자 불안하기만 했다. 종례시간이 지나고 있는데도 담임쌤이 오지 않아 길어지고 있었다. 시계만 바라보며 초조해하는 승민을 보다 못한 현진이 책상을 손톱으로 톡톡 쳤다. 왜. 하고 현진을 바라보자 조용히 속삭였다.
"지금 나가봐. 담임은 내가 맡아볼게."
"뭐?"
친구 한 번 믿어봐라. 하고 한쪽 눈을 감으며 찡긋 윙크하는데 기분이 좋진 않았다. 미친놈인가. 승민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맡겨보기로 하고 급히 나와 계단을 내려가자 종례 시간이라 한산한 복도가 보였다. 괜히 눈에 띄면 안될 거 같아서 땀을 빼면서 창문 밑에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았다. 다행히 정인의 반 종례는 일찍 끝났다. 아이들이 우르르 나오기 시작하자 무릎을 펴고 일어난 승민은 교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곧 눈이 마주쳤다. 가방에 책을 넣고 있는 양정인을.
"......"
"......"
드디어 찾았다.
"양정인."
"아니, 잠깐. 잠깐만 기다려."
정인은 잠깐만을 외치며 손을 뻗었지만 승민은 신경도 쓰지 않고 성큼 다가가 끌어당겨 안았다. 뻗었던 손이 승민의 가슴팍에 닿아 구겨지면서 품에 들어간 정인은 눈을 크게 뜨며 상황 파악하기 바빴다.
"공부 열심히 하겠다며, 공부하러 왜 안 와."
"아니 잠깐만."
"왜 피하는데. 이유라도 알자. 나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어 정인아."
네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너무 낯설고 불안해. 정인은 여태 보지 못한 승민의 행동과 말에 당황해 일단 손에 힘주면서 떼어내기 바빴다. 지금 반 애들 아직 남았는데.
"좀 비켜봐. 여기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보잖아."
"응."
"어이가 없네 진짜. 일단 놔봐. 얘기할게."
이틀 만에 보는 정인에 승민은 사실 주변이 보이지도 않았다. 정인이 혼자 주변 시선이 느껴지면서 정신이 확 차려지는 것 같았고 겨우 힘을 주어서 승민을 떼어두었다. 내 말도 안 듣는 이 형이 뭐가 예쁘다고 난 정말. 정인은 자신에게 억울해져 속으로 원망하며 말했다.
"좋아해서 그랬어. 형은 그냥 나를 받아주는 건데 나 혼자 오해하기 싫어서."
"......"
승민은 정인의 말을 듣고 정말 얻어맞은 듯했다. 그니까 쟤는 지금 내가 안 좋아하는 데 억지로 키스를 했다는 거야?.
"정인아"
"응"
"너는 지금 내가 마음에도 없는 사람한테 키스하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거야?"
승민은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숨을 뱉으며 웃으니 정인은 그럼 진짜 형이 날 좋아야 한다고?.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채워져 어질러지고 있었다.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자 제대로 말도 안 나와 더듬으며 말했다.
"아니, 그... 그. 그러니까."
어느새 반에는 둘만 남았다. 승민은 당황한 듯한 정인의 얼굴을 보며 사뭇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나 너 좋아해. "
"......"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한참 정적이 이어졌다. 정인은 승민의 진심을 듣고도 한참을 얼어있었다. 안 좋아한다며. 나는 그냥 애지중지하는 동생이라며. 그동안 서러웠던 마음들이 한 번에 몰려오는 듯 눈이 붉어지고 코끝이 찡했다. 승민은 가만히 정인을 바라보다 붉어지는 눈 끝에 미안해져 다시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정인은 가까워진 승민의 허리 쪽 셔츠를 잡으며 말했다.
"진짜 형. 나쁜 놈인 거 알지."
"응."
"누가 양아치인지..."
"그래서 싫다고?"
"...아니, 좋아."
솔직한 정인의 말에 승민은 웃으며 숙여진 머리 위로 턱을 올리자 고개를 든 정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잔뜩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귀여운 놈. 근데 공부는 해야 한다?"
"형은 지금 공부 얘기가 하고 싶어?"
9월 모의고사가 끝났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을 나가버리는 승민의 반에는 혼자 남아 풀었던 시험지에 가채점을 하고 있으면 열리는 뒷문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시험 잘 봤어?"
"그럭저럭. 너는?"
정인은 자랑스럽게 시험지를 내밀었다. 물론 기적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목표했던 평균 70점 대를 달성했고, 승민은 보자마자 기특하니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쓰다듬었다.
"잘했네, 그래도 공부한 보람이 있어."
"그럼 나. 소원 들어주기로 한 거 들어줘."
"그래. 말해봐."
승민의 말에 정인은 침을 삼키기도 하고 한참을 우물쭈물 말을 못 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형한테 나는 뭐야?"
다시 답해줘. 이게 정인의 소원이었다. 당차게 말해놓고 부끄럽긴 한지 뜨거워진 귀를 만지며 시선을 살짝 피하면 승민은 그런 정인이를 바라보다 미소를 짓고 귀를 잡고 있는 손 위로 손을 겹치곤 거리를 좁혔다. 단숨에 얼굴이 가까워지자 정인은 놀라면서도 눈을 떼지 못 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윽."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신경 쓰이고 곁에 두고 싶은 사람."
"아, 알았어. 이제 그만해."
"많이 아끼고 사랑해."
낯간지러움에 정인은 알레르기 반응이라도 올라오는 듯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몸을 이리저리 두지 못 하다가 마지막 말에 다시 한번 승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분히 내려앉은 눈에 내가 보이는 게 진짜 같아서, 이게 정말 꿈만 꾸던 일이라. 정인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나도."
"다시."
"나도 사랑해."
그냥 잡담... 넘기셔도 됩니다.
이 레전드 교복 승양 보고 임보함 박혀있던 거 쓰기 시작한 거였는데...........😭(현생이슈로 너무 뒷북)
'애지중지하는 동생' 실제로 승민이가 했던 말인데 좋아하는 승양 영상 중 하나예요~!
https://youtu.be/8Y90Pq5YKCo?si=MLn8P1y2YuKg-ufS
ㄴ 6:15초부터 있습니다. 형이 동생이라고 말하는 데 너무 부끄러워함. 끝내 '애지중지' << 너무 수상함요.
C.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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